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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우라 가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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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우라 가즈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1993년 투수로 입단하여 2019년 은퇴할 때까지 20년 이상 활약했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후 1루수와 지명 타자로 뛰며 2001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했고, 3번의 골든 글러브상과 2010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2005년과 2010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2018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에 입성했다. 은퇴 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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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우라 가즈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쿠우라 가즈야 (지바 롯데 마린스)
후쿠우라 (지바 롯데 마린스)
포지션1루수/코치
소속 구단지바 롯데 마린스
등번호70
타석
투구
프로 입단 정보
데뷔 리그NPB
데뷔 일자1997년 7월 5일
데뷔팀지바 롯데 마린스
최종 출장 일자2019년 9월 23일
최종 소속팀지바 롯데 마린스
드래프트 순위1993년 드래프트 7순위
선수 통계 (2019년 기준)
리그NPB
타율.284
홈런118
RBI935
안타2,000
선수 경력
선수지바 롯데 마린스 (1994–2019)
코치지바 롯데 마린스 (2018, 2019–현재)
수상 경력
올스타3회 NPB 올스타 (2000, 2004, 2005)
골든 글러브3회 골든 글러브상 (2003, 2005, 2007)
베스트 나인1회 베스트 나인 (2010)
수위 타자1회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 (2001)
우승 경력2회 일본 시리즈 우승 (2005, 2010)
명구회메이큐카이 회원 (2018년)
프랜차이즈 선수프랜차이즈 선수 (22년)
기타 정보
출생지지바현 나라시노시
신장183
체중88
학교나라시노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
역할1, 2군 통괄 타격 코디네이터

2. 프로 입단 전

구마모토현 출신 아버지와 지바현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당시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나라시노시로 이사했다. 나라시노 시립 오쿠보히가시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3] 나라시노시의 야구팀 "아즈마 클럽"에 소속되었다.[4] 이 무렵에는 텔레비전으로 요미우리의 경기를 자주 보면서, 시노즈카 가즈노리요시무라 사다아키 등에 주목했다.[5] 또,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나라시노 고등학교를 지망하며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나라시노 시립 제2중학교에서는 리틀 리그에서 한때 플레이했던 관계농구부에 입부했지만, 몇 달 후에 야구부로 전부했다.[6] 1년 후에는 에이스가 되어, 3학년 봄에 시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중학교 시절에 같은 고향 출신인 이노우에 타카오와 투구 대결을 한 적도 있다.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레귤러가 되었고, 2학년 때부터는 4번 타자로 정착했다. 고등학교 통산 2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7] 2학년 가을 무렵부터는 최고 속도 142km/h의 스트레이트와 커브의 조합을 무기로[8][9] 에이스로도 활약했다. 2학년 여름()의 현 대회에서는 도쿄가쿠칸 기술과의 4회전에서 홈런을 쳤다. 팀은 베스트 8에 진출했지만, 준준결승에서 다치카와 타카시를 보유한 타쿠쇼쿠 대학 코료에 패배했다. 가을 관동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는 교세이 국제고에 8회 콜드 패배. 3학년 봄()에는 연습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여름 현 대회에서는 3회전에서 노다키타 고등학교에 패배했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지역 구단 지바 롯데 마린스에 투수로서 7순위 지명되어 입단했다. 지명이 없었다면 사회인 팀에서 야구를 계속하는 진로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 해는 드래프트 회의에서 역지명 원년이었고, 동시에 시작된 프리에이전트도 맞물려 각 구단 지명 선수 수를 줄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롯데는 7명째를 지명하여, 전 구단을 포함해 이 드래프트 회의에서 최종 지명자가 되었다. 지배하 등록 선수 정원 70명의 마지막이라는 취급으로 등번호는 '''70'''으로 결정되었다.

2. 1. 유소년기 (나라시노시 아즈마 클럽)

구마모토현 출신 아버지와 지바현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나라시노시로 이사했다.나라시노 시립 오쿠보히가시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3] 나라시노시의 야구팀 "아즈마 클럽"에 소속되었다.[4] 이 무렵에는 텔레비전으로 요미우리의 경기를 자주 보면서, 시노즈카 카즈노리나 요시무라 사다아키 등에 주목했다.[5] 또,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나라시노 고등학교를 지망하며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2. 2. 중학교 시절 (나라시노 시립 제2중학교)

구마모토현 출신 아버지와 지바현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나라시노시로 이사했다.[3].나라시노 시립 오쿠보히가시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3] 나라시노시의 야구팀 "아즈마 클럽"에 소속되었다.[4]。나라시노 시립 제2중학교에서는 리틀 리그에서 한때 플레이했던 관계농구부에 입부했지만, 몇 달 후에 야구부로 전부했다.[6]。1년 후에는 에이스가 되어, 3학년 봄에 시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중학교 시절에 같은 고향 출신인 이노우에 타카오와 투구 대결을 한 적도 있다.。

2. 3. 고등학교 시절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

후쿠우라 가즈야는 구마모토현 출신 아버지와 지바현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나라시노시로 이사했다.[3] 나라시노 시립 오쿠보히가시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3] 나라시노시의 야구팀 "아즈마 클럽"에 소속되었다.[4]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나라시노 고등학교를 지망하며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나라시노 시립 제2중학교에서는 농구부에 입부했지만, 몇 달 후에 야구부로 전부했다.[6] 1년 후에는 에이스가 되어, 3학년 봄에 시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레귤러가 되었고, 2학년 때부터는 4번 타자로 정착했다. 고등학교 통산 2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7] 2학년 가을 무렵부터는 최고 속도 142km/h의 스트레이트와 커브의 조합을 무기로[8][9] 에이스로도 활약했다. 2학년 여름()의 현 대회에서는 도쿄가쿠칸 기술과의 4회전에서 홈런을 쳤고, 팀은 베스트 8에 진출했지만, 준준결승에서 다치카와 타카시를 보유한 타쿠쇼쿠 대학 코료에 패배했다. 가을 관동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는 교세이 국제고에 8회 콜드 패배했다. 3학년 봄()에는 연습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여름 현 대회에서는 3회전에서 노다키타 고등학교에 패배했다.

3. 프로 선수 시절 (지바 롯데 마린스)

## 1994년 ~ 2000년: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 그리고 주전으로

후쿠우라는 지바현 나라시노시 출신으로,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에 7순위로 지명되어 투수로 입단했다.[10] 그러나 입단 직후 반 년 동안 어깨 부상을 세 차례나 겪으면서 투수로서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당시 2군 타격 코치였던 야마모토 코지의 권유로 타자 전향을 결심, 1994년 7월에 타자로 전향했다. 이후 3년간 1군 출장 없이 팜에서 실력을 연마했으며, 이 시기에 사토 카네이치 2군 수비 코치의 집중 훈련을 통해 1군 수준의 수비력을 갖추게 되었다.[10] 1994년 10월 8일 이스턴 리그 최종전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토모리 유이를 상대로 2루타를 기록하며 팜에서의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1995년에는 렌 사카타 2군 감독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에 따라 팜에서 76경기에 출장, 타율 .263, 5홈런, 23타점을 기록하며 주니어 올스타에 출전했고, 8월에는 이스턴 월간 MVP를 수상했다.[11] 1996년에는 1군 승격 없이 54경기에서 타율 .235, 9타점으로 다소 부진했지만, 9월에는 타율 .333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시즌 오프에는 흑조 리그에 참가하여 기량을 더욱 향상시켰다.

1997년, 스프링 캠프에서 콘도 아키히토 감독의 눈에 띄어 7월 5일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12] 같은 날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7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윌리 프레이저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중전 안타)를 기록했다. 이후 15일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 첫 끝내기 안타, 8월 1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3번 타자 겸 1루수로 주전 자리를 굳혔다.[13] 67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89를 기록했으며, 시즌 후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제해 온 여성과 결혼했다.

1998년에는 등번호를 '''9'''번으로 변경하고 개막부터 주전으로 129경기에 출장,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284(타격 랭킹 12위)를 기록했다. 7월 10일 닛폰햄전에서는 이시이 타케히로를 상대로 프로 첫 끝내기 홈런을 날렸다. 팀은 6월 13일부터 프로야구 기록인 18연패를 기록했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꾸준히 선발 출장했다. 7월 7일 오릭스전(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는 1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팀은 '칠석의 비극'이라 불리는 패배를 당했다.[14]

1999년에는 프랭크 보릭, 하쓰시바 기요시 등에게 주전 1루수 자리를 내주며 선발 출장이 줄었지만, 타율 .277, 득점권 타율 .361로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했다.[15] 시즌 막바지부터는 외야 수비를 맡는 경우도 많아졌다.

2000년에는 이시이 히로오의 가세로 외야 출장이 늘었지만, 오픈전부터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한때 4할에 가까운 타율로 타격 랭킹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16] 시즌 중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전 자리를 지키며 첫 올스타 게임 출전을 달성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96으로, 3할에 아쉽게 미치지 못했다.[17]

## 2001년: 타격왕 등극

2001년, 후쿠우라는 1루수로 복귀하여 이치로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틈을 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타격왕 경쟁을 벌였다.[18] 9월 14일 시점에서 오가사와라(.344)에게 뒤진 .326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이후 55타수 27안타(.491)를 기록하며 막판 스퍼트를 통해 오가사와라를 제치고 타율 .346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18] 이 해에 "치면 히트"라는 신기한 감각을 느꼈다고 한다.[19] 또한, 18홈런을 기록하며 지바 롯데의 간판 타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20] 좌타자 상대로 .387의 타율을 기록하며 좌투수에 강한 면모를 보였고,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도 리그 1위(.304)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을 통해 1억 엔 플레이어가 되었다.[20]

## 2002년 ~ 2004년: 꾸준한 활약과 골든 글러브 수상

2002년에는 스트라이크 존 변경과 상대 투수들의 집중 견제로 리그 최다 17사구를 기록하는 어려움 속에서도,[21] 2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다.[21] 득점권 타율은 .247로 낮았지만,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은 .272로 여전히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22]

2003년 시즌에는 전 경기(140경기)에 출장하여 172안타, 21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23] 3년 연속 3할 타율, 2년 연속 40 2루타(최초),[23] 시즌 2번의 1경기 5안타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4] 10월 5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끝내기 2루타로 시즌 50번째 2루타를 기록하며 역대 두 번째 기록을 달성했다.[25] 시즌 172안타는 2010년 니시오카 츠요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구단 역대 3위 기록이었다.[26] 외야 수비도 겸하며 3년 만에 외야수로도 출전했지만, 1루수 부문에서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7]

2004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56홈런)을 세운 이승엽이 입단했지만, 후쿠우라는 타율 .314, 11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1루수 자리를 지켰다.[28] 양대 리그 최다인 42개의 2루타, 3년 연속 40 2루타(NPB 최초)를 기록했고,[28] 8월 2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6월 1일 같은 팀과의 경기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를 상대로 개인 통산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29] 또한, 두 번째 올스타 게임 출전과 미·일 야구 대회에도 참가했다.

## 2005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다소 불안한 시즌을 보냈지만, 시즌 종반에 5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달성했다.[108] 찬스에서의 강한 면모는 변함없이 지바 롯데 마린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타격 호조를 유지하며 지바 롯데의 31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의 상대 투수 사지키하라 마사시로부터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108]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허리 통증 때문에 선수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팀은 아시아 시리즈에서 우승하여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108] 또 그 해에는 리그 최상위에 해당되는 9개의 희생 플라이를 기록했다.[108]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한 그의 활약은 이 시기 그의 선수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 2006년 ~ 2011년: 부상과 부진, 그리고 베스트 나인

2006년 4월에는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하였고,[30] 7월에는 몸에 맞는 볼에 의해 왼쪽 손목에 골절상을 입는 부상을 당해 약 1개월 간 전력에서 이탈당하는 상황도 있었다.[31] 그러나 6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달성하며 시즌 성적은 타율 3할 1푼 2리, 4홈런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FA권을 취득했다.[31]

투수에서 1루수로 전향한 후쿠우라의 기술은 전 시카고 컵스 선수인 마크 그레이스와 비교되었다. 그는 1997년 7월 일본 프로 야구 (NPB)에 데뷔하여 2018년 명구회에 입성하기까지, 통산 타율 0.284, 118홈런, 935타점을 기록했으며, 2,000안타라는 중요한 이정표를 달성했다.

그의 수상 경력으로는 3번의 NPB 올스타 선정(2000, 2004, 2005), 3번의 골든 글러브상(2003, 2005, 2007), 2010년 베스트 나인상이 있다. 특히 2001년 퍼시픽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2005년과 2010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5년 기준 통산 타율 0.302, 2001년 이후 매 시즌 3할 이상을 기록하는 꾸준함은, 그는 파워 히터가 주를 이루는 포지션에서 컨택 히터로서의 그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그는 2003년 50개의 2루타, 2004년 42개의 2루타로 퍼시픽 리그 1위를 차지하며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2007년에는 개막 직후 오른 옆구리 갈비뼈 골절로 1개월간 이탈 하는 등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타율 .258, 4홈런이라는 1군에서는 자기 최저의 성적을 기록하며 규정 타석에 간신히 1타석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수비에서는 건재함을 과시하며 3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획득했다.

2008년에는 허리 통증과 목 통증 등 부상으로 고생하며[33] 성적이 더욱 하락했다. 선발 출장이 감소하고 지명 타자나 대타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8년 연속 시즌 100안타 기록도 중단되었다.

2009년 시즌 초반에는 타율 2할대 초반, 득점권 타율 1할대, 장타율도 2할대 후반에 침체되었으나, 8월부터 컨디션을 회복하며 8월과 9월 두 달 동안 49안타, 타율 .363을 기록하여 시즌 종반에는 다시 3번 타자로 정착했다. 3할 타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2년 만에 100안타와 규정 타석을 달성했다.

2010년에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과 김태균의 가세 등을 고려하여 지명 타자로 전향했다.[35] 시즌 초반에는 7번이나 대타로 출장했지만, 후반에는 5번이나 6번 타순을 맡는 경우도 많아졌다. 규정 타석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타율 .295, 13홈런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연장 11회에 결승 솔로 홈런을 날려 승리에 기여했고,[38]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시즌 3위에서 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지명 타자 부문에서 첫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39]

2011년 8월 6일, QVC 마린 필드에서


2011년에는 개막전에서 3점 홈런을 날리는 등 시즌 초반 4번 타자를 맡았지만, 이후 부진에 빠지며 8월 이후에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종적으로 타율 .223, 3홈런, 43타점으로 1군에서 자기 최저 성적을 기록했고, 팀도 1998년 이후 최하위로 침몰했다.[40]

## 2012년 ~ 2019년: 베테랑의 품격, 그리고 은퇴

2012년, 개막 이후부터 선발 출전하는 일이 많았지만 교류전 이후, 특히 여름 이후에는 경기 종반 대타로 출전이 많아져, 45안타, 타율 .250, 홈런은 1군 정착 이후 처음으로 0개를 기록했다. 대타로는 5타석 연속 안타를 기록하는 등 승부에 강한 타격을 보여주었고, 7월 18일 도호쿠 라쿠텐전에서 대타 끝내기 희생 플라이,[43] 8월 29일 같은 경기에서는 9회말 대타 동점타를 날리는 등,[44] 대타 성적은 타율 .424, 타점 8을 기록했다.

2013년에는 이구치 타다히토가 1루수로 전향하고, G.G.사토, 크레이그 브라젤이 가세하면서 전년보다 적은 78경기에 출전했다. 홈런은 0개, 타율과 타점도 전년보다 낮았지만, 9월에는 월간 타율 .429로 호조를 보였고, 9월 30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는 구단 최다인 11번째 끝내기 타점 희생 플라이를 날렸다.[45] 8월 2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1828안타로 호리 고이치의 안타 수를 넘어 구단 역대 3위가 되었다.[46]

2014년에는 1997년 이후 17년 만에 개막을 2군에서 맞이했다. 6월에 1군 등록 후, 자신의 최다인 4타석 연속 적시타를 기록했고,[47] 7월에는 타율 .371로 호조를 유지했다. 8월 이후 부진하여 출장 경기 수와 안타 수는 각각 43경기, 26안타로 자신의 최저 기록이었지만, 타율 .283, 대타율 .474를 기록했다. 9월 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대타 끝내기 2루타를 쳐, 자신이 가진 구단 최다 기록을 경신하는 통산 12번째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48]

2015년, 시즌 첫 선발 출전이었던 4월 9일 오릭스전에서 5년 만에 1경기 2홈런을 기록했지만,[49] 4월 하순 요관 결석으로 인해 일시 등록이 말소되었다. 5월 복귀 후에는 선발 출장도 종종 있었고, 최종적으로 73경기 출전에 47안타, 타율 .272를 기록했다. 6월 1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50] 2015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홋카이도 닛폰햄과의 경기에서는 선발 출전한 2경기에서 7타수 4안타를 기록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무안타로 끝났다.

2016년, 스프링 캠프에서 왼쪽 발목 부상으로 1군 승격이 7월 13일로 늦어졌지만, 같은 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 출장으로 홈 구장 QVC 마린 필드에서 통산 10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51] 이후 8월 19일에 왼쪽 등 근육통으로 일시 등록이 말소되는 등, 1군에서는 자신의 최저 기록인 36경기에 출전하여 20안타, 7타점으로 끝났다.

2017년에는 2년 연속 개막 1군에서 제외되었지만, 4월 12일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1루수를 맡았던 선수의 부진과 부상 이탈 등으로 인해 1루수로 출전할 기회가 늘었다. 7월 7일 오릭스전에서는 4년 만에 희생 플라이를 기록, 자신의 구단 통산 기록을 75개로 경신하여 퍼시픽 리그 단독 5위가 되었다. 이후 일시적으로 타율이 2할 아래로 떨어졌지만, 9월에는 월간 타율 .304를 기록했다. 9월 12일 오릭스전에서는 5년 만에 1경기 4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날, 2018년 시즌에도 현역으로 속행하는 것이 확실시되었고, 구단 간부로부터 통산 2000안타 달성을 향해 지원하는 방침이 명시되었다.[52] 10월 19일, 2018년부터 선수 겸 타격 코치가 되는 것이 발표되었다.[53] 감독으로 취임한 이구치 타다히토의 현역 은퇴로 구단 최고령 선수가 되었고, 마츠이 카즈오와 함께 야구계 최고령 야수가 되었다.[54]

2018년, 1군 타격 코치 겸 내야수로 시즌을 맞이하여, "7번・지명 타자"로 5년 만에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42세 3개월의 개막 선발은 1978년 노무라 카츠야 (42세 9개월)에 이은 구단의 최고령 기록이다.[55] 4월 10일 세이부전이 통산 2162경기 출전이 되어, 에노모토 키하치를 넘어 구단의 최다 신기록이 되었다.[56] 5월 10일, 토리고에 히로유키 헤드 겸 내야 수비・주루 코치의 헤드 코치 전임으로 인해 코사카 마코토 2군 내야 수비・주루 코치가 1군으로 승격되면서 코치 등록을 말소하고 선수로 전임되었다.[57] 9월 9일 세이부전에서 구단 사상 4번째로 42세 이상에서의 홈런을 기록했다.[58] 9월 22일 세이부전 4번째 타석에서 오가와 류야를 상대로 우중간 2루타를 날려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59] 42세 9개월에 달성은 와다 카즈히로에 이은 최고령 기록이며 좌타자로는 최고령이다. 투수 등록을 경험한 선수의 달성은 사상 5번째이며, 드래프트 7위의 달성자는 후쿠모토 유타카에 이어 2번째, 최종 지명 선수로는 첫 쾌거이다.[61][62] 연호 "헤이세이"에서는 마지막 2000안타 달성자이자 명구회 입성이 되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다음 해 현역 속행을 선언했지만, 이후 목 통증 치료를 우선하여 등록이 말소되었다.[63] 10월 8일 경기 전에는 명구회 입회 세레모니가 열려 연맹 표창, 나라시노 시민 영예상, 명구회 블레이저가 수여되었다.[64] 최종적으로 8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10, 타점 11, OPS .505를 기록했다.

2019년, 우에하라 코지와 함께 야구계 최고령 선수가 되었고, 선수 겸임으로 2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 1월 24일에 같은 해 한정으로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66] 구단으로부터 코치에 중점을 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은퇴할 마음이 강해졌다고 하며,[67] "젊은 선수들을 제대로 지도하여 팀이 강해져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코멘트했다. 구단은 등번호 9를 준 영구 결번으로 결정했다. 시즌 중에는 대부분 코치 업무에 전념하여 선수로서는 2군에서 대타로 기용되거나, 4월 20일에 개최된 "후쿠우라 카즈야 데이" 등의 이벤트에 모습을 보였다.[68] 5월 11일 이스턴 리그 나라시노시 아키츠 구장 경기에서는 나라시노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 동기와 시구식에 등판했고,[69] 6월 14일 "ALL for CHIBA 나라시노시" 경기에서는 동교 야구부 전 감독 이시이 요시히로의 시구식 타석에 섰다.[70] 최종적으로 2군에서 1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7, 타점 4, OPS .694를 기록했다.

9월 23일, 은퇴 경기가 되는 닛폰햄전에 맞춰 그해 첫 1군 승격. 후쿠우라 자신은 A클래스 경쟁을 고려하여 출전을 고사했지만, 이구치 감독의 배려로 "7번・DH"로 선발 출장했다.[71][72] 당일 감독・코치・선수 전원이 등번호 "9"를 입고, 스타킹도 후쿠우라와 같은 올드 스타일로 임했다. 가이힌마쿠하리역 직원과 게이세이 버스 운전사 등도 유니폼을 착용했고, 역 내나 버스 차내에서의 응원가 방송, 역 전광 게시판에 메시지 표시, 인근 호텔에서의 일루미네이션 등, 구단 사상 전례 없는 노력이 이루어졌다.[73] 경기 전 시구식에서는 후쿠우라의 차남이 마운드에 올랐고, 후쿠우라가 타석에 섰다. 경기는 4타수 무안타로 끝났지만(현역 마지막 타석은 뜬공), 9회에 지명 타자를 해제하고 1루 수비를 맡아 2사에서 히라누마 쇼타의 라인 드라이브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 플레이로 직접 위닝 볼을 잡아냈다.[74] 경기 후 은퇴 세레모니에서는 마츠이 카즈오가 등장했다.

3. 1. 1994년 ~ 2000년: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 그리고 주전으로

후쿠우라는 지바현 나라시노시 출신으로, 나라시노 시립 나라시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에 7순위로 지명되어 투수로 입단했다.[10] 그러나 입단 직후 반 년 동안 어깨 부상을 세 차례나 겪으면서 투수로서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당시 2군 타격 코치였던 야마모토 코지의 권유로 타자 전향을 결심, 1994년 7월에 타자로 전향했다. 이후 3년간 1군 출장 없이 팜에서 실력을 연마했으며, 이 시기에 사토 카네이치 2군 수비 코치의 집중 훈련을 통해 1군 수준의 수비력을 갖추게 되었다.[10] 1994년 10월 8일 이스턴 리그 최종전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토모리 유이를 상대로 2루타를 기록하며 팜에서의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1995년에는 렌 사카타 2군 감독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에 따라 팜에서 76경기에 출장, 타율 .263, 5홈런, 23타점을 기록하며 주니어 올스타에 출전했고, 8월에는 이스턴 월간 MVP를 수상했다.[11] 1996년에는 1군 승격 없이 54경기에서 타율 .235, 9타점으로 다소 부진했지만, 9월에는 타율 .333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시즌 오프에는 흑조 리그에 참가하여 기량을 더욱 향상시켰다.

1997년, 스프링 캠프에서 콘도 아키히토 감독의 눈에 띄어 7월 5일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12] 같은 날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7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윌리 프레이저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중전 안타)를 기록했다. 이후 15일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 첫 끝내기 안타, 8월 1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3번 타자 겸 1루수로 주전 자리를 굳혔다.[13] 67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89를 기록했으며, 시즌 후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제해 온 여성과 결혼했다.

1998년에는 등번호를 '''9'''번으로 변경하고 개막부터 주전으로 129경기에 출장,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284(타격 랭킹 12위)를 기록했다. 7월 10일 닛폰햄전에서는 이시이 타케히로를 상대로 프로 첫 끝내기 홈런을 날렸다. 팀은 6월 13일부터 프로야구 기록인 18연패를 기록했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꾸준히 선발 출장했다. 7월 7일 오릭스전(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는 1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팀은 '칠석의 비극'이라 불리는 패배를 당했다.[14]

1999년에는 프랭크 보릭, 하쓰시바 기요시 등에게 주전 1루수 자리를 내주며 선발 출장이 줄었지만, 타율 .277, 득점권 타율 .361로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했다.[15] 시즌 막바지부터는 외야 수비를 맡는 경우도 많아졌다.

2000년에는 이시이 히로오의 가세로 외야 출장이 늘었지만, 오픈전부터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한때 4할에 가까운 타율로 타격 랭킹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16] 시즌 중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전 자리를 지키며 첫 올스타 게임 출전을 달성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96으로, 3할에 아쉽게 미치지 못했다.[17]{{R|goo20131023"/>

3. 2. 2001년: 타격왕 등극

2001년, 후쿠우라는 1루수로 복귀하여 이치로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틈을 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타격왕 경쟁을 벌였다.[18] 9월 14일 시점에서 오가사와라(.344)에게 뒤진 .326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이후 55타수 27안타(.491)를 기록하며 막판 스퍼트를 통해 오가사와라를 제치고 타율 .346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18] 이 해에 "치면 히트"라는 신기한 감각을 느꼈다고 한다.[19] 또한, 18홈런을 기록하며 지바 롯데의 간판 타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20] 좌타자 상대로 .387의 타율을 기록하며 좌투수에 강한 면모를 보였고,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도 리그 1위(.304)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을 통해 1억 엔 플레이어가 되었다.[20]

3. 3. 2002년 ~ 2004년: 꾸준한 활약과 골든 글러브 수상

2001년, 후쿠우라 가즈야는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1루수 주전 자리를 되찾았다.[18]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의 치열한 타격왕 경쟁 끝에, 시즌 막판 55타수 27안타(.491)를 기록하며 타율 .346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18] 또한, 1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첫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18] 좌타자 상대로 .387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도 리그 1위인 .304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컨택 능력을 보여주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을 통해 1억 엔 연봉을 받게 되었다.[20]

2002년에는 스트라이크 존 변경과 상대 투수들의 집중 견제로 리그 최다 17사구를 기록하는 어려움 속에서도,[21] 2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다.[21] 득점권 타율은 .247로 낮았지만, 2스트라이크 이후 타율은 .272로 여전히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22]

2003년 시즌에는 전 경기(140경기)에 출장하여 172안타, 21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23] 3년 연속 3할 타율, 2년 연속 40 2루타(최초),[23] 시즌 2번의 1경기 5안타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4] 10월 5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끝내기 2루타로 시즌 50번째 2루타를 기록하며 역대 두 번째 기록을 달성했다.[25] 시즌 172안타는 2010년 니시오카 츠요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구단 역대 3위 기록이었다.[26] 외야 수비도 겸하며 3년 만에 외야수로도 출전했지만, 1루수 부문에서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7]

2004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56홈런)을 세운 이승엽이 입단했지만, 후쿠우라는 타율 .314, 11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1루수 자리를 지켰다.[28] 양대 리그 최다인 42개의 2루타, 3년 연속 40 2루타(NPB 최초)를 기록했고,[28] 8월 2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6월 1일 같은 팀과의 경기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를 상대로 개인 통산 첫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29] 또한, 두 번째 올스타 게임 출전과 미·일 야구 대회에도 참가했다.

3. 4. 2005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다소 불안한 시즌을 보냈지만, 시즌 종반에 5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달성했다.[108] 찬스에서의 강한 면모는 변함없이 지바 롯데 마린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타격 호조를 유지하며 지바 롯데의 31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의 상대 투수 사지키하라 마사시로부터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108]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허리 통증 때문에 선수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팀은 아시아 시리즈에서 우승하여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108] 또 그 해에는 리그 최상위에 해당되는 9개의 희생 플라이를 기록했다.[108]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한 그의 활약은 이 시기 그의 선수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3. 5. 2006년 ~ 2011년: 부상과 부진, 그리고 베스트 나인

2006년 4월에는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하였고,[30] 7월에는 몸에 맞는 볼에 의해 왼쪽 손목에 골절상을 입는 부상을 당해 약 1개월 간 전력에서 이탈당하는 상황도 있었다.[31] 그러나 6년 연속 3할대의 타율을 달성하며 시즌 성적은 타율 3할 1푼 2리, 4홈런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FA권을 취득했다.[31]

투수에서 1루수로 전향한 후쿠우라의 기술은 전 시카고 컵스 선수인 마크 그레이스와 비교되었다. 그는 1997년 7월 일본 프로 야구 (NPB)에 데뷔하여 2018년 명구회에 입성하기까지, 통산 타율 0.284, 118홈런, 935타점을 기록했으며, 2,000안타라는 중요한 이정표를 달성했다.

그의 수상 경력으로는 3번의 NPB 올스타 선정(2000, 2004, 2005), 3번의 골든 글러브상(2003, 2005, 2007), 2010년 베스트 나인상이 있다. 특히 2001년 퍼시픽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2005년과 2010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5년 기준 통산 타율 0.302, 2001년 이후 매 시즌 3할 이상을 기록하는 꾸준함은, 그는 파워 히터가 주를 이루는 포지션에서 컨택 히터로서의 그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그는 2003년 50개의 2루타, 2004년 42개의 2루타로 퍼시픽 리그 1위를 차지하며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2007년에는 개막 직후 오른 옆구리 갈비뼈 골절로 1개월간 이탈 하는 등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타율 .258, 4홈런이라는 1군에서는 자기 최저의 성적을 기록하며 규정 타석에 간신히 1타석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수비에서는 건재함을 과시하며 3번째 골든 글러브상을 획득했다.

2008년에는 허리 통증과 목 통증 등 부상으로 고생하며[33] 성적이 더욱 하락했다. 선발 출장이 감소하고 지명 타자나 대타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8년 연속 시즌 100안타 기록도 중단되었다.

2009년 시즌 초반에는 타율 2할대 초반, 득점권 타율 1할대, 장타율도 2할대 후반에 침체되었으나, 8월부터 컨디션을 회복하며 8월과 9월 두 달 동안 49안타, 타율 .363을 기록하여 시즌 종반에는 다시 3번 타자로 정착했다. 3할 타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2년 만에 100안타와 규정 타석을 달성했다.

2010년에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과 김태균의 가세 등을 고려하여 지명 타자로 전향했다.[35] 시즌 초반에는 7번이나 대타로 출장했지만, 후반에는 5번이나 6번 타순을 맡는 경우도 많아졌다. 규정 타석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타율 .295, 13홈런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연장 11회에 결승 솔로 홈런을 날려 승리에 기여했고,[38]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시즌 3위에서 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지명 타자 부문에서 첫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39]

2011년에는 개막전에서 3점 홈런을 날리는 등 시즌 초반 4번 타자를 맡았지만, 이후 부진에 빠지며 8월 이후에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종적으로 타율 .223, 3홈런, 43타점으로 1군에서 자기 최저 성적을 기록했고, 팀도 1998년 이후 최하위로 침몰했다.[40]

3. 6. 2012년 ~ 2019년: 베테랑의 품격, 그리고 은퇴

2011년 시즌 개막전에서 3점 홈런을 날리는 등 활약하며 초반에는 4번 타자를 맡았지만 부진에 빠졌다.[40] 6월에는 월간 타율 .346으로 회복했지만, 7월부터 9월까지는 1할대로 다시 침체되었다. 8월 이후에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져 규정 타석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80안타, 타율 .223, 홈런 3개, 타점 43점으로 1군에서 자신의 최저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고, 팀도 1998년 이후 최하위로 침몰했다.[40] 삼진은 72개로, 예년보다 삼진율이 높은 시즌이었다. 4월 13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350 2루타를 달성했는데, 1654경기 만의 달성은 역대 3위의 스피드 기록이다.[41]

2012년, 개막 이후부터 선발 출전하는 일이 많았지만 교류전 이후, 특히 여름 이후에는 경기 종반 대타로 출전이 많아져, 45안타, 타율 .250, 홈런은 1군 정착 이후 처음으로 0개를 기록했다. 대타로는 5타석 연속 안타를 기록하는 등 승부에 강한 타격을 보여주었고, 7월 18일 도호쿠 라쿠텐전에서 대타 끝내기 희생 플라이,[43] 8월 29일 같은 경기에서는 9회말 대타 동점타를 날리는 등,[44] 대타 성적은 타율 .424, 타점 8을 기록했다.

2013년에는 이구치 타다히토가 1루수로 전향하고, G.G.사토, 크레이그 브라젤이 가세하면서 전년보다 적은 78경기에 출전했다. 홈런은 0개, 타율과 타점도 전년보다 낮았지만, 9월에는 월간 타율 .429로 호조를 보였고, 9월 30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는 구단 최다인 11번째 끝내기 타점 희생 플라이를 날렸다.[45] 8월 2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1828안타로 호리 고이치의 안타 수를 넘어 구단 역대 3위가 되었다.[46]

2014년에는 1997년 이후 17년 만에 개막을 2군에서 맞이했다. 6월에 1군 등록 후, 자신의 최다인 4타석 연속 적시타를 기록했고,[47] 7월에는 타율 .371로 호조를 유지했다. 8월 이후 부진하여 출장 경기 수와 안타 수는 각각 43경기, 26안타로 자신의 최저 기록이었지만, 타율 .283, 대타율 .474를 기록했다. 9월 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대타 끝내기 2루타를 쳐, 자신이 가진 구단 최다 기록을 경신하는 통산 12번째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48]

2015년, 시즌 첫 선발 출전이었던 4월 9일 오릭스전에서 5년 만에 1경기 2홈런을 기록했지만,[49] 4월 하순 요관 결석으로 인해 일시 등록이 말소되었다. 5월 복귀 후에는 선발 출장도 종종 있었고, 최종적으로 73경기 출전에 47안타, 타율 .272를 기록했다. 6월 1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50] 2015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홋카이도 닛폰햄과의 경기에서는 선발 출전한 2경기에서 7타수 4안타를 기록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무안타로 끝났다.

2016년, 스프링 캠프에서 왼쪽 발목 부상으로 1군 승격이 7월 13일로 늦어졌지만, 같은 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 출장으로 홈 구장 QVC 마린 필드에서 통산 10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51] 이후 8월 19일에 왼쪽 등 근육통으로 일시 등록이 말소되는 등, 1군에서는 자신의 최저 기록인 36경기에 출전하여 20안타, 7타점으로 끝났다.

2017년에는 2년 연속 개막 1군에서 제외되었지만, 4월 12일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1루수를 맡았던 선수의 부진과 부상 이탈 등으로 인해 1루수로 출전할 기회가 늘었다. 7월 7일 오릭스전에서는 4년 만에 희생 플라이를 기록, 자신의 구단 통산 기록을 75개로 경신하여 퍼시픽 리그 단독 5위가 되었다. 이후 일시적으로 타율이 2할 아래로 떨어졌지만, 9월에는 월간 타율 .304를 기록했다. 9월 12일 오릭스전에서는 5년 만에 1경기 4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날, 2018년 시즌에도 현역으로 속행하는 것이 확실시되었고, 구단 간부로부터 통산 2000안타 달성을 향해 지원하는 방침이 명시되었다.[52] 10월 19일, 2018년부터 선수 겸 타격 코치가 되는 것이 발표되었다.[53] 감독으로 취임한 이구치 타다히토의 현역 은퇴로 구단 최고령 선수가 되었고, 마츠이 카즈오와 함께 야구계 최고령 야수가 되었다.[54]

2018년, 1군 타격 코치 겸 내야수로 시즌을 맞이하여, "7번・지명 타자"로 5년 만에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42세 3개월의 개막 선발은 1978년 노무라 카츠야 (42세 9개월)에 이은 구단의 최고령 기록이다.[55] 4월 10일 세이부전이 통산 2162경기 출전이 되어, 에노모토 키하치를 넘어 구단의 최다 신기록이 되었다.[56] 5월 10일, 토리고에 히로유키 헤드 겸 내야 수비・주루 코치의 헤드 코치 전임으로 인해 코사카 마코토 2군 내야 수비・주루 코치가 1군으로 승격되면서 코치 등록을 말소하고 선수로 전임되었다.[57] 9월 9일 세이부전에서 구단 사상 4번째로 42세 이상에서의 홈런을 기록했다.[58] 9월 22일 세이부전 4번째 타석에서 오가와 류야를 상대로 우중간 2루타를 날려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59] 42세 9개월에 달성은 와다 카즈히로에 이은 최고령 기록이며 좌타자로는 최고령이다. 투수 등록을 경험한 선수의 달성은 사상 5번째이며, 드래프트 7위의 달성자는 후쿠모토 유타카에 이어 2번째, 최종 지명 선수로는 첫 쾌거이다.[61][62] 연호 "헤이세이"에서는 마지막 2000안타 달성자이자 명구회 입성이 되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다음 해 현역 속행을 선언했지만, 이후 목 통증 치료를 우선하여 등록이 말소되었다.[63] 10월 8일 경기 전에는 명구회 입회 세레모니가 열려 연맹 표창, 나라시노 시민 영예상, 명구회 블레이저가 수여되었다.[64] 최종적으로 8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10, 타점 11, OPS .505를 기록했다.

2019년, 우에하라 코지와 함께 야구계 최고령 선수가 되었고, 선수 겸임으로 2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 1월 24일에 같은 해 한정으로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66] 구단으로부터 코치에 중점을 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은퇴할 마음이 강해졌다고 하며,[67] "젊은 선수들을 제대로 지도하여 팀이 강해져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코멘트했다. 구단은 등번호 9를 준 영구 결번으로 결정했다. 시즌 중에는 대부분 코치 업무에 전념하여 선수로서는 2군에서 대타로 기용되거나, 4월 20일에 개최된 "후쿠우라 카즈야 데이" 등의 이벤트에 모습을 보였다.[68] 5월 11일 이스턴 리그 나라시노시 아키츠 구장 경기에서는 나라시노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 동기와 시구식에 등판했고,[69] 6월 14일 "ALL for CHIBA 나라시노시" 경기에서는 동교 야구부 전 감독 이시이 요시히로의 시구식 타석에 섰다.[70] 최종적으로 2군에서 1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7, 타점 4, OPS .694를 기록했다.

9월 23일, 은퇴 경기가 되는 닛폰햄전에 맞춰 그해 첫 1군 승격. 후쿠우라 자신은 A클래스 경쟁을 고려하여 출전을 고사했지만, 이구치 감독의 배려로 "7번・DH"로 선발 출장했다.[71][72] 당일 감독・코치・선수 전원이 등번호 "9"를 입고, 스타킹도 후쿠우라와 같은 올드 스타일로 임했다. 가이힌마쿠하리역 직원과 게이세이 버스 운전사 등도 유니폼을 착용했고, 역 내나 버스 차내에서의 응원가 방송, 역 전광 게시판에 메시지 표시, 인근 호텔에서의 일루미네이션 등, 구단 사상 전례 없는 노력이 이루어졌다.[73] 경기 전 시구식에서는 후쿠우라의 차남이 마운드에 올랐고, 후쿠우라가 타석에 섰다. 경기는 4타수 무안타로 끝났지만(현역 마지막 타석은 뜬공), 9회에 지명 타자를 해제하고 1루 수비를 맡아 2사에서 히라누마 쇼타의 라인 드라이브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 플레이로 직접 위닝 볼을 잡아냈다.[74] 경기 후 은퇴 세레모니에서는 마츠이 카즈오가 등장했다.

4. 은퇴 이후

후쿠우라 가즈야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1, 2군 플레잉 코치 겸 타격코치를 맡았다.[77] 2020년부터 2021년까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 2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를 역임했다.[77] 입단 당시와 같은 등번호 '''70'''번을 사용했다.[77] 2022년부터는 1군 타격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78]

2023년부터는 1군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춘계 캠프와 시범경기 기간 동안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이 마사토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의 투수 코치로 활동하는 기간에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

5. 플레이 스타일

후쿠우라 가즈야는 183cm의 장신으로 균형 잡힌 체형을 가졌지만 발이 빠르지 않아 내야 안타는 적은 편이다. 라이너로 외야 사이를 가르는 2루타를 때려내 2001년에는 수위타자를 차지했지만 도루는 단 한 개도 없었다.[79][80] 이는 수위타자 중 도루가 없는 최초의 사례이다. 2005년 일본 시리즈나 2007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봄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지만 5~6월에 컨디션을 끌어올렸다가 여름에 다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을에 들어서면 다시 상태를 회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6년 시즌에는 3·4월의 월간 MVP를 차지하고 6월까지 타율 1위를 기록했지만, 여름의 부진(7월 월간 타율 1할대)으로 최종 5위에 그쳤다.

5. 1. 타격

후쿠우라 가즈야는 183cm의 장신으로 균형 잡힌 체형을 가졌지만 발이 빠르지 않아 내야 안타는 적은 편이다. 라이너로 외야 사이를 가르는 2루타를 때려내 2001년에는 수위타자를 차지했지만 도루는 단 한 개도 없었다.[79][80] 이는 수위타자 중 도루가 없는 최초의 사례이다. 2005년 일본 시리즈나 2007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봄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지만 5~6월에 컨디션을 끌어올렸다가 여름에 다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을에 들어서면 다시 상태를 회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6년 시즌에는 3·4월의 월간 MVP를 차지하고 6월까지 타율 1위를 기록했지만, 여름의 부진(7월 월간 타율 1할대)으로 최종 5위에 그쳤다.

안정된 궤도의 스윙으로 광각으로 라이너를 날리는 타격이 특징이다.[79][80] 공을 포착하는 기술이 뛰어나, 전 감독 야마모토 코지는 "타격에 관해서는 천재적인 센스를 가진 선수로, 배트 컨트롤은 천성적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현역 말년의 감독 이구치 타다히토와 나라시노고교 선배 카케후 마사유키는 후쿠우라의 타격의 부드러움과 타이밍이 무너져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81][82]

좌투수의 바깥쪽 공을 어려워했지만, 2001년에 타율 .408을 기록하며 극복, 같은 해부터 6년 연속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2010년대에는 5년간 대타 타율 .315를 기록하는 등, 대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83] 2루타가 많은 것도 특징으로, 통산 2루타는 전체 안타의 19.4%를 차지하며, 두 번의 시즌 최다 2루타와 3년 연속 40개 이상의 2루타를 기록했다.[84] 전 감독 바비 발렌타인은 "부상만 없었다면 항상 3할을 칠 실력이 있었고, 메이저에 와도 2루타를 양산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85]

타석에서는 왼 엉덩이에 힘을 주고 왼쪽 겨드랑이를 열어 타격 포인트를 몸 가까이에 둠으로써 마지막까지 공을 파악하고 스윙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폼을 시도했고, 한때는 추의 타법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허리 통증과 나이로 인해 폼을 재검토했다.[86][87] 후년에는 힘을 빼고 자세를 잡고 임팩트 순간에 힘이 들어가는 폼을 모색했다고 한다.[88]

5. 2. 수비

후쿠우라 가즈야는 183cm의 장신으로 균형이 잡힌 체형을 가졌지만 발은 느린 편이었다.[91] 1루 도달 시간은 4.77초였다.[91] 주루에 대한 의욕이 높지 않아 통산 도루 수는 2000안타 달성자 중 가장 적었다.

1루 수비는 부드러운 글러브질과 정확한 송구에 정평이 있었으며, 수비의 명수라고도 평가받았다.[89] 고관절의 유연성을 살려 벗어난 송구나 어려운 원바운드 송구도 쉽게 포구하는 능숙함을 보였으며, 이마에 토시아키는 "후쿠우라 씨가 없었다면 팀의 실책은 두 배로 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UZR에서 사용하는 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1루 선에 강한 1루수 랭킹"에서 1위, "1・2루 간에 강한 1루수 랭킹"에서도 2위에 오르는 등 포지셔닝의 장점과 수비 범위의 넓이를 엿볼 수 있었다.[90] 레인지 팩터는 2000년대 상위 5위 안에 3번이나 후쿠우라가 포함되는 등, 매년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연도1루외야
경기척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경기척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19976554630747.988-
19981271116656133.995-
19997425823535.9901820110.955
20009364443254.9975874241.950
2001116112259592.996-
2002133119576697.995-
200313513281017109.995230001.000
20041111040656106.995-
2005112102048795.993-
2006112101970680.995-
200710390268573.995-
20088664256258.997-
200912486973174.999-
20101075417.988-
201126233220181.000-
20124031631422.989-
201332182190131.000-
201418112150111.000-
20154428224316.990-
20162112090121.000-
201731152190111.000-
2018261001.000-
2019110001.000-
통산161613180921731163.9957897351.952



2019년 기준, 연도에서의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이다. 과거에 외야를 맡았던 적도 있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어깨 힘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6. 수상 및 기록

후쿠우라 가즈야는 일본 프로 야구 (NPB)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로, 통산 타율 0.284, 118홈런, 935타점을 기록했으며, 2,000안타를 달성했다. 3번의 NPB 올스타 선정(2000, 2004, 2005), 3번의 골든 글러브상(2003, 2005, 2007), 2010년 베스트 나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퍼시픽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2005년과 2010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50개의 2루타, 2004년 42개의 2루타로 퍼시픽 리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명구회에 입성했다.

후쿠우라 가즈야의 주요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수위 타자: 1회 (2001년)
  • 베스트 나인: 1회 (지명 타자 부문, 2010년)
  • 골든 글러브상: 3회 (1루수 부문, 2003년, 2005년, 2007년)
  • 월간 MVP: 1회 (야수 부문, 2006년 4월)
  • 퍼시픽 리그 연맹 특별 표창: 1회 (공로상, 2019년)
  • 나리타 시민 영예상 (2018년)
  • 지바 시장 특별 표창 (홈타운 감동상, 2018년)
  • 지바 이미지 업 대상 (2019년)


후쿠우라의 주요 개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97년 7월 5일, 오릭스 버팔로스(오릭스 블루웨이브) 14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 첫 안타: 상동, 4회말에 윌리 프레이저로부터 중전 안타
  • 1000안타: 2004년 8월 2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3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역대 225번째
  • 1000경기 출장: 2005년 5월 12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역대 402번째
  • 1500안타: 2009년 5월 2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5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역대 99번째
  • 1500경기 출장: 2009년 8월 19일, 오릭스 버팔로스 17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역대 166번째
  • 100홈런: 2010년 3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3차전 (세이부 돔) ※역대 258번째
  • 2000경기 출장: 2015년 6월 1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48번째
  • 2000안타: 2018년 9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4차전 (ZOZO 마린 스타디움) ※역대 52번째
  • 시즌 50 2루타 (2003년) ※타니 요시토모에 이어 역대 2번째
  • 3년 연속 40 2루타 (2002년 - 2004년) ※NPB 기록
  • 6년 연속 타율 3할 (2001년 - 2006년) ※역대 11번째
  • 올스타전 출장: 3회 (2000년, 2004년, 2005년)
  • 통산 끝내기 안타: 12개 ※구단 기록, 퍼시픽 리그 4위 타이기록


그는 선수 생활 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은퇴 후에도 지바 롯데 마린스의 코치를 역임하며 다음 세대 선수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린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활약하며 팀과 일본 야구에 헌신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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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뉴스 ロッテ福浦、4年目デビューで2000安打到達は https://www.nikkansp[...] 2018-09-23
[63] 뉴스 【ロッテ】福浦、限界だった…2000安打達成翌日抹消へ https://hochi.news/a[...]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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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서적 プロ野球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2007 アスペクト
[80] 서적 プロ野球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2011 廣済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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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서적 ベースボールサミット第6回 カンゼ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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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6-12
[108] 문서 2005년 시즌 타격 성적(.29953)이 사사오입으로 적합한 3할의 타율을 기록했고 덧붙여서 2002년의 타격 성적(.3003)은 적합한 수준이자 3할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109] 문서 지명타자 부문
[110] 문서 모두 내야수 부문
[111] 문서 2006년은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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